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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April 8, 2015

판결 - 프란츠 카프카

처음 시 소설을 읽고 어리둥절해서 한 번 더 읽어보았으나 당혹스러웠다. 주인공의 독백과 주인공의 아버지의 말은 서로 다른 진실을 가리키고 있는데, 그 중 누가 진실인지 카프카는 끝까지 제대로 밝히지 않는다. 주인공이 믿을 수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이거나, 어느 비평에서 말한 대로 주인공의 아버지가 그저 노망난 사람일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읽어본 소설에서는 '믿을 수 없는 화자'를 추리/범죄소설의 트릭으로 활용하거나(가령 애거사 크리스티의 여러 소설 등), 보편적인 사회적 가치와 명백히 어긋난 주인공에 대해 독자가 공감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장치(주인공이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여러 소설...시계태엽 오렌지가 이런 부류라고 들었는데, 아직 읽어보거나 영화를 보지 못했다)였다. 다만 첫 번째 경우에는 소설 결말에 가서 화자가 바뀌거나 진실을 간접적으로 고백하는 형식으로 독자에게 반전을 알려주고, 두 번째 경우에는 여러가지 은유적인 장치를 통해 독자가 가치관의 충돌(values dissonance, TV Tropes에서 좋아하는 용어)을 깨닫게 해 준다. 하지만 <판결>에서는 이러한 어떤 요소도 없기 때문에 독자(내)가 주인공이 사기꾼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

그런 한편 주인공의 아버지의 말과 주인공의 태도를 봐도 무언가 수상하다. 아버지가 주인공을 다그칠 때 주인공은 제대로 항변하기보다는 채찍 앞에 웅크리는 짐승처럼 벌벌 떠는 모습이였다. 물론 이것이 일부 서평에서 말한 대로 카프카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주인공이 단순히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항변하지 못한 것뿐 아니라, 실제로 스스로의 양심에 걸리는 무언가가 있었기에 태연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다만 이 의견은 다소 위험할 수 있는 것이, 대개 집단괴롭힘이나 왕따 등의 지속적인 폭력 범죄에 노출된 피해자에 대해 '왜 반항하지 못했냐'라며 가해자가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떠넘기는 구실처럼 들린다. 따돌림과 집단괴롭힘을 직접 겪어봤던 입장으로서 내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 소름끼치기도 한다. 뭐, 따지고 보면 주인공의 친구에 대한 주인공 자신의 독백 역시 다소 모순적인 요소가 약간 있었으니, 어느 정도 의구심이 들 만하다.

이래저래 참 혼란스럽고 불편한 글이다. 왜 카프카는 결론을 내지 않았을까? 창작물에서 작가가 결말에 대해 '독자에게 맡기는' 경우는 많지만, 그런 경우에도 어느 한 가지의 결론을 먼저 생각한 뒤, 이에 대해 조금이나마 더 손을 들어주는 단서를 한두 개 제시하여 독자의 마음을 간지럽힌다. 하지만 <판결>에서는 이와 관해 어떠한 단서도 주지 않고, 주인공이 아버지의 '판결'에 순응하여 자멸(?)하는 것으로 묵직하게 끝내 버린다.